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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최초의 육지전 승리를 거뒀지만 억울하게 죽은 신각 장군

해유령전투의 영웅 신각 장군


임진왜란 최초로 왜군에 승리한 전투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님이 승리로 이끈 옥포대첩 입니다.
그렇다면 임진왜란 최초 육지전에서 승리한 전투는 어느 전투인지 아십니까?
옥포대첩은 많은 분들이 잘 알고 계시겠지만, 육지에서 최초로 승리한 전투는 잘 모르시는 분들이 많으실겁니다.
이 전투는 바로 부원수 신각 장군이 이끌었던 해유령전투 입니다.
왜군을 기습하여, 70명을 죽이는 승리를 거둔 해유령전투.
계속 패전만 하던 임진왜란 초기에, 조선이 거둔 육지전 최초의 승리로 전투의 크고 작음을 떠나서 왜군이 오고있다는 소문만으로도 두려움에 떨며 무너지던 조선군이 왜군과 싸워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된 의미있는 전투였습니다.
하지만 해유령 전투를 이끈 부원수 신각 장군은 억울한 죽음을 맞이합니다.
대체 무슨일이 있었기에 전투에서 승리한 장수가 죽게되었을까요?
이번 포스팅에서 한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신각장군은 조선 중기의 무신입니다.
본관 평산으로 무과에 급제하고 영흥부사를 거쳐 1587년(선조 20) 경상도방어사가 됩니다.
5년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합니다.
1592년 4월 13일(음력) 20만 병사로 조선을 침공한 일본.
왜군의 공격에 조선군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집니다.
마지막으로 믿었던 신입이 4월28일 탄금대에서 패배하자 조선의 국왕 선조는 4월30일 개성으로 몽진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선조는 김명원을 도원수, 신각을 부원수로 삼아 한강에서 적의 진격을 저지하려 명했고, 우의정 이양원을 유도대장으로 임명해 한양을 사수하게 합니다.
이에 김명원은 천여명 정도의 병력을 이끌고 용산의 둔지산 일대에서 왜군의 한강 도하를 저지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5월2일 신무기 조총으로 무장한 수만명의 왜군이 강을 건너자 도원수 김명원은 신각의 만류에도 불고하고 한강방어를 포기하고 임진강 방면으로 도망칩니다.

중요한 한강 방어선을 포기하고 도주하는 도원수 김명원을 부원수 신각은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유도대장 이양원과 함께 한양 북쪽의 양주로 이동을해 병사들을 수습했습니다.
이때 마침 군사를 이끌고 내려온 함경도 남병사 이혼과 인천부사 이시언이 거느리고 온 병력과 합세해 양주에서 방어선을 구축했습니다.
한편 선조는 한양이 점령당했다는 말을 듣고 음력 5월3일 다시 평양으로 피난을 갑니다.

음력 5월10일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왜군은 파주를 거쳐 임진강 유역에 도착합니다.
그러나 배가 없어 왜군은 임진강 유역에 머무르며 도하준비를 하게됩니다.
이때도 왜군의 약탈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던중 왜군 일부가 파주방면에서 양주방면으로 향하고 있다는 정보를 신각 장군이 입수합니다.
조선군은 해유령고개 좌우에 은밀히 매복을 하고 약탈을 마치고 돌아가는 왜군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음력 5월 16일 조선군이 공격할거라고는 생각조차 않고 있던 왜군은 무방비 상태로 해유령고개로 진입합니다.





왜군이 고개 중턱을 지날때 신각장군의 공격명령이 떨어집니다.
이에 맞춰 매복하고 있던 조선군은 사방에서 활을 쏘며 무방비 상태의 왜군을 공격했습니다.
백마를 타고 적을 공격하던 신각장군의 백마는 적군의 피로 붉은색이 되었을 정도라 합니다.
이 공격으로 순식간에 왜군 70명이 죽었습니다.

이 전투가 바로 해유령 전투 입니다.

임진왜란 발발 이후 조선군이 육지에서 왜군을 상대로 최초의 승리를 거둔 전투였습니다.
왜군을 보면 도망가기에 바빳던 조선군이 왜군과 싸워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된 의미있는 전투가 유해령 전투 였습니다.

전투에서 승리한 신각 장군은 왜군의 목을 잘라 평양성에 있는 선조에게 보냅니다.
그런 후 왜군의 북상을 막기위해 대탄이라 불리는 경기도 연천 지역으로 부대를 이동시켜 진영을 갖춥니다.

이때 도원수 김명원은 신각장군과 연락이 두절된 상태였으며, 어디에 있는지 소재 파악을 할 수 없었습니다.
김명원은 조정에 장계를 올렸는데, 신각장군이 자신의 명을 따르지 않고 무단으로 이탈해 한강 방어어 실패했다며 패전의 책임을 그에게 전가했습니다.
선조와 조정 대신들은 왜군을 막을 수 있는 요충지들이 너무 쉽게 함락되었다는 것에 분노했고 전투 과정에서 조선군 장수들이 도망친 사례가 너무  많았기에 조선군의 부원수인 신각 장군을 처형하여 무장들로 하여금 ‘일벌백계’로 삼으려 했습니다.
그리하여 우의정 유홍의 주도하여  신각 장군을 군법으로 다스릴 것 을 선조에게 청했고, 이에 선조는 음력 5월 18일 선전관을 보내 신각을 처형하라 명합니다.

신각을 참수하기 위해 선전관이 떠난 뒤 그날 오후 신각장군의 해유령 전투의 승리 전승보고서와 함께 획득한 왜적의 머리 70여 개가 조정에 도착합니다.

그제서야 진상을 파악한 선조는 급히 선전관을 다시 보내서, 신각장군의 처형 집행 중지를 명 하였으나, 해유령 전투의 지휘관 신각은 이미 억울한 죽음을 당한 뒤였습니다.

〈선조수정실록〉에는 우의정 유홍의 청으로 선조가 선전관을 보내 신각을 현장에서 참수하게 했는데, 선전관이 떠난 뒤에 해유령 전투의 승리를 알리는 첩서가 도착하자 다시 선전관을 보내 중지시키려 했으나 이미 처형이 이루어진 뒤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각 장군의 아내 또한 남편의 시신을 수습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90살 노모만이 세상에 홀로 남겨지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신각의 억울한 죽음에 실망한 함경도 남병사 이혼은 군사를 물려 함경도로 돌아갔으나 반역자들에 의해 함경도 전체가 왜적의 손에 떨어질 때 역도들의 손에 죽었습니다.
유도대장 이양원 역시 이 때 의주에 피난해 있던 선조가 다시 요동으로 건너간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탄식하며 8일간 단식하다가 피를 토하고 죽었습니다.

임진왜란 최초로 육지에서 승리한 해유령 전투의 주역인 신각, 이혼, 이양원은 이렇게 비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신각장군이 승전의 장계를 조금이라도 일찍 올렸더라면, 하다못해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에 대한 장계라도 일찍 조정에 올렸더라면 이런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지 않았을 것 입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두려움을 이겨내고 자신의 생명은 돌보지도 않고 싸웠을 신각장군과 선조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신각장군과 해유령전투 관련 포스팅은 여기까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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